1930년대 ‘오빠부대’ 를 불러온 야구천재 이영민

식민통치 시대 신문물의 대표: 스포츠

식민통치에 억눌려 있었지만 개화기 조선인들은 급격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이를 생활화하기 시작했다. 머리모양도 옷차림도 변했고, 전화, 축음기, 시계를 알게 됐으며, 다방과 댄스홀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주로 경성에 사는 돈 많은 상인이나 엘리트가 누린 것이었지, 대부분의 조선 백성들에겐 근접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당시 평범한 조선인들이 즐길 수 있던 신문물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영화와 스포츠였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한날한시에 수만 군중을 모으고 조선팔도를 들었다 놓았다 한 것은 스포츠가 유일했을 것이다.

프랑스인 교사 마태을(Martel)이 관립 법어학교 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고 운동회에서 기량을 겨루던 1906년, YMCA의 전신인 황성기독청년회의 초대 총무였던 미국인 선교사 길례태(Gillett)는 관립 덕어학교와 황성기독청년회 간의 야구시합을 주선한다. 당시 야구는 행전을 치고 짚신에 저고리 입고 뛰는 수준이었지만 곧 장족의 발전을 거듭한다. 1920년대엔 번듯한 유니폼에 제대로 된 장비를 가지고 야구를 하게 됐고, 서울은 물론 지방에도 야구부가 있어야 학교다운 학교라고 했다. 특히 배재, 휘문, 경신, 오산, 중앙학교 같은 고등부의 야구시합이 있는 날이면 축제 분위기 속에 구경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 신문에서 “야구경기가 열렸다 하면 태산이 무너질 듯하고 바다가 끓는 듯했다”고 쓸 정도로 야구의 인기는 대단했는데,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야구를 주제로 한 미국 영화가 연이어 수입되기도 했다. <최후의 1루> <미끄러져라, 켈리> <멍텅구리 야구왕> <홈런왕> 등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홈런왕>은 뉴욕 양키즈의 베이브 루스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였다. 무성영화였던 이 영화들은 당시로선 대박을 친 영화였다. 당시 조선인들이 워낙 외래 문물에 갈급해 있던 때 여선지 내용이 황당해도 먹혀들 수 있었던 듯하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공을 치자마자 마차를 타고 몇 마일 밖에 떨어진 공을 주워오는 그런 장면들 말이다.”

1922년엔 미국 메이저리거들이 조선을 방문해 친선경기를 벌인 대사건이 있었다. 원래 도쿄와 상하이에서 경기를 가질 예정이었는데, 야구선수 출신으로 조선체육회 이사가 된 이원용이 일본에 건너가 협상을 해서 딱 하루 일정으로 그들이 조선에 건너온 것이다. 12월 8일 오후 용산에서 메이저리그 올스타팀과 전조선청년회팀의 야구시합이 열렸다. 조선인은 물론 서양인들까지 몰려든 이 경기는 대성공이었다. 그 덕에 경기를 주최한 이원용은 돈방석에 앉았다고 한다.

조선 최고의 야구천재 이영민과 베이브루스 함께 찍은 사진

조선야구계 최고의 선수 이영민

조선야구계 최고의 선수는 단연 이영민이었다. 1924년 대구 계성중학에서 서울 배재고보로 스카우트 된, 이 땅의 ‘스카우트 제1호’ 인 그는 1926년 조선육상경기대회 400m에서 54초6의 신기록으로 우승했고 조선 축구대표에 선발됐을 뿐 아니라 경평축구에 선수로, 훗날에는 감독으로 출전할 정도로 발군의 기량을 가진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그는 연희전문에 진학한 이후 야구에 집중했는데, 야구에 입문한 지 얼마되지 않아 조선 최초의 홈런을 날린 선수이기도 하다. 1928년 경성운동장(지금은 헐린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경성의학전문과 연희전문의 경기에서 미루나무들이 늘어선 외야 뒤로 공을 넘겨버린 것이다. 식산은행 야구단에 입단해서는 게이오대학과의 친선경기에서 일본의 강속구 투수 미야다케의 공을 장외로 넘겨버렸고, 1932년부터 경성 대표로 출전한 전일본도시대항야구대회에서는 일본인 팀들을 연파하고 결승에 오르기도 했다. 일본 야구계도’조선에 명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프로야구단 창단을 위해 대일본동경야구구락부를 조직하던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사는 1934년 야구붐 조성을 위해 베이브 루스, 루 게릭이 포함된 미국 올스타팀을 초청했는데, 이영민은 이 시합을 위해 만들어진 전일본팀에 선발된다. 만능선수에 강타자였던 이영민은 미즈하라 시게루, 사와무라 에이지 등 전설적인 일본 야구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나, 일본인 감독은 그를 이따금 대주자로만 기용했다. 그는 이런 차별에 분노하여 이후 미국 원정을 거부하고, 일본 대표팀에서 나와버렸다. 얼마 후 창단될 요미우리 야구단 등 프로팀에 입단할 기회마저 스스로 차버린 것이다.

천재선수였던 그는 엄복동과 더불어 조선 최초의 스포츠 스타 중 한 명이었다. 자전거 수리공 출신인 엄복동과는 달리, 연희전문을 나온 그는 수많은 여성팬을 몰고 다녔다. 그는 엘리트에다가 최첨단 문물인 야구선수였고 장쾌한 홈런을 날리는 남자였다. ‘오빠부대’를 탄생케 한 인물로 가수 조용필을 꼽을 수도 있고, 대학 졸업식에 2000명이 몰려왔다는 농구선수 이상민을 ‘영원한 오빠’로 칭할 수도 있겠지만, 이영민의 여성팬들이야말로 원조 오빠부대였던 셈이다. 장안의 호남아였던 그는 서대문 최고 갑부의 딸이었던 이화여전 출신의 정구선수이보배와 결혼하게 되니, 이 또한 최초의 스포츠스타 커플이었다.

참조: 조선의 스포츠 세계화 효시: 복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