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체육을 통해 민족정신 고취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강한 신체와 체력의 육성을 강조했다. 신채호는 조선인에게 필요한 것은 “서양식 체육으로 단련된 건강한 신체”라 했고, 덕과 지와 체를 기르는 삼육에서 체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안창호 역시 대성학교에서 강한 체육훈련을 실시했다. 이들은 건강한 신체의 육성이 강한 조선인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방편이라 믿었다. 일본인을 공경하고 사랑했던 반면, 같은 민족을 나약한 족속으로 여기고 동양인을 멸시했던 윤치호 · 이광수 · 이승만 같은 이들도 체력 육성이 강한 민족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애초에 이들의 체육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도구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체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일제에 맞서는 자긍심을 키운다는 것이었다. 물론 일제 말기엔 이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체육을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의 도구로 내몰기도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즐기는 차원에서의 스포츠보다는 훈련이나 훈육 차원의 체육에 초점을 둔 체육장려였다.
스포츠를 육성하고 사랑하며 몸소 행한 민족지도자 여운형
당시 모든 지식인 민족주의자들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그중 스포츠를 육성하고 사랑하며 몸소 행한 민족지도자 한 사람을 꼽자면 바로 몽양 여운형(1886~1947)일 것이다. ‘영원한 청춘’으로 불리기도 했던 그는 육상 · 축구 · 야구 · 농구 · 권투 · 유도 · 택견 · 철봉 · 수영 등 당시 조선인들이 하던 대부분의 운동에서 출중한 실력을 보였다. 젊은이들과의 시합에서 쉰의 나이에도 투포환에서 1등을 하기도 했고 축구평을 쓰고 야구심판을 하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만능이었다. 사실 그의 인생은 중요 고비마다 스포츠와 얽혀 있었다. 1929년 상하이 푸젠대학 축구단을 인솔하여 싱가포르,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으로 원정 갔을 때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정책을 통렬히 비판하여 경찰에 붙들리기도 했고, 같은 해 7월엔 상하이 랴오둥경기장으로 야구 구경을 갔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되어 3년간 징역을 살기도 했다. 사람들은 여운형이 체육을 너무 좋아해 경기장에 자주 가다가 체포됐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딸 여연구는 오히려 그가 체육에 남다른 조예가 있고 육체가 강건했기에 더 일찍 체포되지 않고 그때까지 모면할 수 있었다고 말한바 있다. 일찍이 그는 달리는 전차에서 뛰어내려 밀정들의 추적을 피했고, 또 경찰들이 달려들자 2층 창문에서 다른 집 지붕을 타고 도망치기도 했다고 한다.
1934년엔 조선체육회 이사로 있으면서 조선축구협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는데, 운동을 워낙 좋아하고 운동선수들을 무척이나 사랑해 많은 선수들이 몽양을 친부모처럼 따랐다고 한다. 그는 또 시합 관전뿐 아니라 각종 경기 후원과 주최에 나섰고, 일제가 못하게 하면 잠시 틈을 봐서라도 격려사를 할 만큼 스포츠에 애착을 가진 ‘스포츠맨’이었다. 또 힘이 장사여서 사람을 집어던질 정도였다 하고, 지붕을 날아 넘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의 그였기에 해방 전과 직후 혼란기에 무려 열두 차례나 테러를 당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의 암살은 피하지 못해 결국 세상을 떴지만 말이다.
그는 운동경기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보았다. 그래서 스포츠에 때론 은근하게, 때론 노골적으로 반일정신과 독립정신을 불어넣으려 했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 초대 사장으로 취임한 뒤 일본 센슈대학교 권투부를 초청해 벌인 친선경기 개회사에서 그가 천명한 ‘권투정신’을 들어보자.
피를 흘리면서도 싸우고 다운돼도 다시 일어나 싸우는 권투정신은 우리 청년들이 의당 본받아야 할 훌륭한 정신이다. 남성답게 씩씩하게 싸우라. 비겁하지 않고 정정당당히 스포츠맨쉽으로 싸우라. 나는 청년은 내남을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무릇 청년은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아까지 않는 불가슴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스포츠맨십 중에서도 권투정신을 강조했고, 또 경쟁에서의 승리를 강조했다. 표현도 화끈하다. 다른 체육계 인사들에 비할 수 없이 공격적(?)이었다.
우리 조선에만 있다고 볼 수 있는 철학인 ‘남에게 져라. 때리거든 맞아라. 남을 때리지 말라’ 하는 이런 놈의 철학이 어데 다시 있겠오. 오직 망친 조선만 있는 철학입니다.
이렇게 화끈하게 스포츠를 독려했던 그는 자신이 운영했던 신문사에 선수 출신을 많이 채용하기도 했다. 『조선중앙일보』에는 수위에서부터 직공, 기자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 동지들과 당대의 소설가 이태준, 아동문학가 윤석중, 시인 노천명 등이 포진했을 뿐 아니라 연희전문 축구선수 출신인 이영선과 정용수, 그리고 복싱의 극동챔피언 김창엽 등이 있었다. 일이 끝나면 함께 모여 운동을 했으며, 사장실은 체육구락부와 다름 없었다. 게다가 사장 취임 이래 그는 진보적 지식인, 반일 민족주의자 등과 함께 의욕적으로 신문을 발행해 1등 신문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기사를 실으면서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리고 실은 이후 계속된 탄압으로 1937년 결국 신문을 자진 폐간하기에 이른다. 바로 그 『조선중앙일보』의 사진 동판을 빌려가서 열이틀 늦게 일장기 지운 사진을 게재한 『동아일보』는 이후 충성맹세를 한 후 복간됐지만, 『조선중앙일보』는 고원훈 등 친일파를 사장에 앉히라는 총독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진 폐간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일제 말 태평양전쟁이 격렬해질 때도 대부분의 민족지도자들은 독립유보론을 받아들이며 독립보다는 자치를 좇을 때 여운형은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만든다. 또 해방 후를 염두에 두고 치안문제를 연구하기도 하고, 마침내 해방이 이루어지자 좌우합작을 위해 뛰어다니게 된다. 그 와중에도 그는 해체됐던 조선체육회를 대한체육회로 이름을 바꿔 다시 일으켜 세우고 회장에 취임한다.
그러나 좌우 양쪽으로부터 공격받는 상황에서 여운형은 수차례에 걸친 테러에 시달려야 했다. 곤봉과 몽둥이로 맞기도 하고 벽돌을 맞아 기절하기도 했으며, 해방 후엔 대로에서 밧줄에 묶이기도 하고 집 앞에서 소나무에 묶이기도 한다. 자택에서 공격받더니 친구집에서도 습격을 당하고, 황해도 여관까지 쫓아온 자에게 테러를 당한 경우도 있었다. 신당동 산에서는 죽기 직전 낙하(?)해서 도망치기도 하고 권총 · 수류탄 · 사제폭탄 등이 동원돼 그의 집이 반파되기도 했지만, 그는 언제나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졌다. 이쯤 되면 <007>의 제임스 본드 뺨치고도 남을 수준이다. 이게 다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한 덕분이었다. 그래도 그는 굴하지 않고 자녀들을 북으로 보내버리고 남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남 · 북, 미 · 소, 좌 · 우가 뒤엉켜 있던 혼란정국에서 여운형에 대한 테러의 위험성은 높아갔지만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권투시합장에 나타나는가 하면 축구 구경이다, 야구 구경이다 하여 틈만 나면 경기장을 찾았다. 한번은 테러단이 들이닥친다는 첩보를 듣고 화장실 문으로 빠져나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다. 그러나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탄을 맞고 암살당한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역시 스포츠는 그의 운명이었나 보다. 그때 그는 축구경기장에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고 집에 가던 길이었으니 말이다. 그날 오후 서울운동장에서는 우리나라가 IOC의 회원국이 된 것을 경축하기 위해 영국팀과의 친선 축구경기가 열릴 계획이었다. 당시 체육회장이었던 여운형은 한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도 겸임하게 되어 있었기에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가려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트럭이 그가 탄 차를 가로막는 사이 범퍼를 밟고 뒷유리창으로 뛰어오른 괴한의 총탄 두 발에 쓰러진 것이다.
15일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8월 3일 바로 서울운동장에서 손기정 · 김성집 등 평소 그가 아끼던 체육인들이 운구하는 가운데 수만 시민이 운집하여 거행되었다. 조선스포츠의 아버지 여운형의 서거와 함께 스포츠가 이 땅에 정착하기까지 반세기의 지난했던 역사도 막을 내렸다. 스포츠 중계 손오공 티비